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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통신문 2024-2호] 신입회원 인터뷰 : 김종분(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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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작성일
-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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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지난 6월, 광주여성민우회 <신입회원만남의 날> 1958년생 여성의 발언.
오월여성제에 제 발로 찾아와 회원이 되고 싶다고 자청한 그녀, 김종분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민우회를 택했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지난 8월 6일 목포로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담아왔습니다.
인터뷰이 : 김종분(뿌니)
인터뷰어 : 햇살, 수수
인터뷰 정리 : 무도
1. 반갑습니다, 뿌니님. 저희가 회원 인터뷰를 요청한 계기는 <신입회원만남의날>에 하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 창단’ 이야기도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페미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씀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 같아요. 다른 단체들도 많은데 광주여성민우회 회원이 되고 싶다고 하셨던 이유도 너무나 궁금했고요. 때마침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통신문 발행주간이 돼서 좋은 기회다 싶어 만나 뵙게 됐습니다. 왜 민우회였을까요?
광주여성민우회와 한국여성민우회가 같은 방향으로 활동하는지는 모르지만 여성민우회, 여성의 전화, 광주여성회가 비슷한 시기에 생겼잖아요. 저는 고향이 서울이고,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83년에 결혼해서 해남으로 왔어요. 당시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구로공단에 가서 일해보니 저한테는 그게 너무 힘든 일이더라고요. 노동현장으로는 못가겠다고 판단해서 농촌 현장에 가서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해남으로 오기는 했지만 85년~87년에는 광주에서 살았어요. 당시에는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이 생기기 전이고 가톨릭농민회나 기독교농민회가 있어서 남편이 전남기독교농민회(이하 전남기농) 총무를 했거든요. 당시 전남기농은 ‘무안 양파 제값 받기 투쟁’이라던가 ‘동복댐 수몰 지역 투쟁’ 등 지역에 지원할 일이 많았고 치열하게 싸우고 할 때였어요. 그래서 남편을 도와 지원을 나가곤 했어요. 전남기농 사무실이 유동 YWCA에 있어서 광주지역 여성 활동가들도 알게 됐죠. 함께 87년 6월 항쟁을 겪으면서 그분들 내에서 여성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전까지 광주에 여성단체는 없었고 송백회(1978 결성된 전남·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여성 관련 단체_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양심수 후원을 목적으로 설립됨)가 있었거든요. 남편이 송백회 회원들과 친해서 저도 친분이 생겼고 송백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송백회 선배들은 80년 오월항쟁 참여로 고초를 겪었고 너무 짐이 무거웠기 때문에 여성회에 참여하는 걸 주저했어요. 저는 여성회 설립에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설립 초기에는 여러 활동과 논의를 같이 하기도 했지만, 남편이 87년 말 해남으로 가자고 하면서 현실적으로 계속하기 힘들겠다고 판단해서 한발 물러섰죠.
해남에 가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 하면서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이하 전농), 전여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이하 전여농) 산하의 해남군여성농민회를 만들었어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농민운동하다가 시민사회단체도 하고 정치를 하면서 도의원도 하고(제6대 전라남도의회 비례대표, 1998~2002), 군의원(제5대 해남군의회 의원, 2006~2010)도 했어요. 제가 77학번인데 80년에 학생운동 하면서 5‧18관련 유인물을 뿌리고 구속되고 제적이 됐다가 93년 복학해서 한 학기를 공부했어요. 그때 서울여성의전화에 가서 교육도 받고 한 적이 있어서 2002년~2006년도까지 해남가정폭력상담소 소장을 했거든요. 여성농민회 활동을 접은 후로는 해남YMCA 청소년 위원장, 해남 동화 읽는 여성 모임 대표 등 시민단체 활동을 했어요. 해남가정폭력상담소 소장 하던 때 광주여성의전화, 광주여성민우회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여성의 전화는 해남에 없는 쉼터 연계나 이런 것 때문에 연락을 자주 해서 잘 알고 있었고, 민우회는 당시 미디어교육(어린이TV프로그램모니터교육등) 같은 걸 하는데 너무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간 제가 해남에서 했던 활동은 농민회, 여성농민회 중심이어서 기층운동이었다고 한다면 저는 민우회 활동 같은 중산층 여성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어요. 상담소는 사람한테 감정이입 해야 하고 에너지도 있어야 하니까 후배에게 넘기고, 정치 활동 끝내면서 해남에서 살지 말지 고민하다가 2016년도에 서울로 이사했어요. 제가 원래 대학 다닐 때는 소설을 썼거든요. 이젠 내 속에 들어가서 글을 좀 쓰자고 했는데 또 일이 터졌어요. 내가 80년에 5·18 관련해서 구속돼서 5·18 유공자예요. 근데 서울 갔더니 5·18 서울 일을 맡아 달라는 거예요. 직장생활하면서 2018년에 5‧18구속부상자회 서울시지부장을 맡았는데 2019년 2월에 김진태 이종명 의원 등이 5·18왜곡 공청회 한 것 때문에 난리가 나서 그해 내내 국회 앞에 천막치고 농성하고 성명서 쓰고 하면서 이렇게 시간이 가버렸어요. 국회 앞에서 농성하면서 보니까 5‧18폄훼가 여전한 거예요. 그래서 여성들의 오월항쟁구술집을 내야겠다 맘먹고 송백회 언니들을 설득했어요. 오월항쟁에 참여한 송백회 여성들 책을 낸 게 제게는 정말 의미있는 일이었어요. 책(5·18의 기억과 역사9-송백회 편/518기념재단) 내고 12월에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전남도에서 여성가족정책관 임용직 공모가 난 거예요. 서류넣고 면접보고 이래서 또 바로 2020년 1월부터 목포로 내려오고 도에 들어가 근무하게 됐죠.
햇살, 수수 : 그럼 여성가족정책관 일을 은퇴 전까지 계속하신 거네요?
뿌니 : 그렇죠. 작년 2023년에야 끝났어요. 퇴임하고 시간이 있어서 오월여성제 참여도 한 건데 그게 일반 개인 여성들이 오는 덴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한 번 가본 건데 거기서 민우회를 만났고 깜짝 놀라고 너무 좋고 반갑고 그랬어요. 이제 드디어 만났잖아요. 그전부터 민우회를 하고 싶었는데. 함께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민우회에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민우회에 가입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되겠냐, 더 미루면 나도 안 될 것 같길래 그때 한 거죠.
햇살, 수수 : 그러면 앞으로 어떤 걸 함께 하고 싶으신 거예요?
뿌니 :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제 들어와서……민우회는 정책 관련해서 폭넓게 일반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궁금해요. 어때요?
햇살 : 저희는 중심에 두고 하는 사업이 정책센터구요. 그래서 전진숙 의원뿐만 아니라 광주여성민우회 출신 의원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책을 바꾸기 위한 기조로 계속 활동하고있고, 에코페미니즘 운동도 계속하면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 또 돌봄 같은 것도 정책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죠.
뿌니 : 사실 도여성국장으로 일하면서 정부의 여성정책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걸 많이 경험했어요. 다양한 가족에 대한 정책도 그렇고 육아휴직도 그렇고요. 여성정책 예산도 적어요. 그래도 정책 현장에 있으니까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 알았는데 이제 일선에서 멀어지면 변화되는 걸 따라잡지 못하잖아요. 젊은 사람들 의견도 듣고 책도 읽으면서 더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페미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고 한 거구요. 그러면 민우회에서는 그런 걸 다 정책으로 해서 포럼이나 토론회 의제로 갖고 가겠네요.
햇살 :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죠. 다양한 가족 구성권 관련해서도 작년에 조례 모니터링도 하고 카드뉴스도 만들고 하면서 어떻게 회원들과 결합해서 활동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요.
뿌니 : 그럼 분과가 몇 개 있나요? 모임이라고 해야 하나?
햇살 : 네, 소모임이 있어요. 연극, 풋살, 에코페미니즘, 독서모임, 등산모임 이렇게요.
뿌니 : 독서모임에선 뭐 읽어요? 요즘은 페미니즘 관련해서 공부할래도 책을 알아야 읽지. 내가 전혀 이름도 모르겠고 제목도 모르겠고, 어머~내가 진짜 완전 옛날 사람 된 것 같아요.
햇살 : 그럼 이제 뭔가 정책 모니터링 하신다거나 이런 걸 해보시면 좋을까요?
뿌니 : 그건 좋아요. 그건 내가 쉽게 할 수 있어요. 제가 일했던 분야니까요.
2. 통신문을 읽는 회원들도 알 수 있도록 뿌니를 소개할 만한 키워드 세 가지 정도가 뭐가 있을까요?
첫 번째는 여성농민회 했던 것. 내가 그걸 10년이나 13년 정도 열정을 바쳐서 했으니까, 해남군 여성농민회, 전여농을 뺄 수가 없어요. 그 다음은 5·18, 내 인생을 바꾼 게 5·18이죠. 내가 5·18로 인해서 구속이 되었고 전라도로 왔고 항상 다른 일을 하면서도 5·18 때문에 머리 한쪽이 무거워요. 그래서 송백회 항쟁사 정리하고 해남 항쟁사도 정리를 했거든요. 또 마지막으로는 여성가족정책관 하면서 성평등예산을 늘리고 전남 여성 정책, 여성가족, 아동 등 다양한 가족 정책 자리 잡게 한 걸 얘기하고 싶어요.
3. 농민회 활동 계속하시고 특히나 전여농 조직하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전여농이 생소한 분도 있을 수 있어서 어떤 조직인지 설명 부탁드려요. 전국농민총연맹(이하 전농)이 있음에도 여성농민회를 따로 조직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을까요? 전여농에서 뿌니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전여농은 전국적으로 여성 농민들이 만든 단체인데 여성농민의 권익 향상과 사회 변혁 의지를 가진 단체예요. 제가 83년 결혼하고 1년 정도는 애만 키우고 84년부터 기독교농민회 이런저런 활동 하다가 87년 6월 항쟁 끝나고 해남 가서 남편이 농민회 하는 걸 도우면서 85년에서 95년까지 정말 농민회에 열정을 쏟아부었어요. 해남여성농민회에서는 교육부장, 총무, 부회장 이런 활동을 했고요. 처음부터 여성농민회를 독자적으로 따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 해남 갔을 때는 해남군 기독교농민회가 있었고 전농은 이후에 90년에 생겼죠. 저희가 막 갔을 때는 수세(水稅) 투쟁(일제강점기부터 생긴 ‘물값’으로, 댐과 저수지, 수로 등 수리시설 건설비·관리유지비·직원 인건비 등에 필요한 부담을 농민들에게 모두 전가함) 이런 거 결합하고 제가 해남군농민회 교육부장을 맡았어요. 그전에 ‘무안 양파 제값 받기 운동’할 때도 그렇고 수세 투쟁 때도 활동을 하면서 보니까 투쟁 현장에 여성들도 많이 나온 걸 본 거예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은 밥을 해서 나오는 거였죠. 초창기에는 남성들도 농민운동 할 때 부부갈등이 심했어요. 관에서 쫓아오지, 농사 안 하고 남자들이 밖으로 뛰어다니면 농사일은 다 여자들 몫이니까. 저는 활동가로 결혼했고 교육활동 하면서 왜 농민운동을 해야 하는지, 왜 남자들의 활동을 이해해야 하는지 이런 이야기를 해주니까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성들도 함께해야 한다' 이런 방향에 맞춰서 제가 교육을 한 거예요.
여성 단일 조직에 대한 논의는 1989년 ‘쌀값 보장 투쟁’ ‘수세투쟁’을 거치면서 돌아가신 이종옥 선배같은 여성농민 1세대 활동가 내에서 여성농민회를 따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온 거예요. 처음에는 반발이 컸죠. '농민운동 같이하면 하는 거지 왜 따로 만들려는 거냐', '분파주의냐', 남성들 처지에서는 여성들이 따로 모이면 남편들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가정이 불화하거나 조직이 깨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들, 자기들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어서 반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해남은 88년에 ‘수몰토지보상투쟁’이라는 걸 했는데 현산면 쪽에 축협 땅이 있었어요. 축협에서 댐을 만들려고 하면서 거기 30호쯤 되는 마을 사람들을 다 나가라고 한 거예요. 근데 그 지역 농민들이 “안 나가겠다.”, “여기에 왜 댐을 만드느냐?” 며 저희에게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의논을 해 온 거예요. 들어가서 보니까 그 마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말하는 게 당차고 입장이 명확했어요. 그래서 이 여자들을 붙들고 해야겠다 생각하고 농성을 이끌었죠. 여자들이 마이크 잡고 얘기하게 하고 투쟁하니까 결국 축협에서 농민들이 요구한 보상비 주고 나가는 거로 결정이 됐어요. 쌀값 보상투쟁은 남자들이 타협을 보고 끝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거는 여성들이 나서서 승리한 거잖아요. 이걸 보니까 여성농민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국의 상황을 보면 전여농 만드는 걸 처음에는 남성활동가들이 많이 반대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걸 어떻게 뚫고 나갈까 하다가 해남군농민회가 먼저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 안에 여성위원회로 있다가 독립해야겠다고 협의를 끌어냈어요.
농민회(전농)는 그냥 투쟁하면서 앞으로 막 가는 거라고 하면, 실제로 그 내부에서 여자들 중에는 ‘우리 남편이 안 때렸으면’, ‘술 마시고 마을에서 지랄 좀 안 했으면’. 밖에 나가면 훌륭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집에서 문제 많은 남자들도 많고 또 남자들이 전국단위로 활동할 때 남아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여성이고, 여성들이 마을을 벗어나서 활동하기는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상황에 맞게 우리가 교육이나 투쟁을 풀어나가겠다 이렇게 하니까 해남군농민회에서도 받아준 거죠.
어쨌든 농민운동이 지향하는 목표나 과제는 여성 농민도 같지만, 단순히 밥하는 사람으로만 자리매김하지 말고 우리도 나서서 마이크 들고 얘기하고 투쟁 이끌고 하니까 그런 취급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4. 여성농민회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 남는/뿌듯한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전여농 만드는 과정 등에서 부침도 많고 설득하기 힘들기도 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됐던 원동력이 있다면 그게 뭐였을까요?
87년 겨울에 제가 해남에 갔고 89년에 해남군 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 만들고 90년에 전농이 만들어지고 90년 12월쯤 해남군 여성농민회를 창립했거든요. 해남군 여성농민회 만든 게 가장 뿌듯하죠. 그리고 우리 활동가 중에선 학생 운동하던 사람들도 있지만, 현장 출신을 많이 찾아냈구요. 전혀 운동이나 이런 것 모르고 농사짓던 여자들을 활동가로 만들어내고 그분들이 계속 활동하고 계시니까 그게 제일 좋죠.
전여농은 명확한 성과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직불금 문제라거나, 예전에는 농협에서 조합원을 가구당 1명씩, 남성들만 받았어요. 근데 우리가 싸워서 여성농민의 지위를 인정받은 거지요. 우리가 나가서 밭일도 하고 트랙터도 몰고 하는데 왜 우리를 농민으로 인정 안 해주느냐, 여성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그래서 요즘은 트랙터 등 농기계 교육도 여성 농민 따로 해주고 농협에서 여성 이사, 감사도 나오게 됐죠.
또 전남의 경우는 여성농민 지원금(여성농어업인 행복바우처)이 1년에 한 번 나오는 게 있어요. 여성농민들 쓰라고 주는데 자꾸 가족을 위해 쓰는 거예요. 그래서 조항도 달아놨어요. 파마하든지, 옷을 사 입든지, 영화를 보든지 자신을 위해 쓰시오.
제가 아까 85년부터 95년 정도까지 농민회에 온 열정을 쏟아서 일했다고 했잖아요.
그후에는 방향을 좀 바꿨어요. 일을 하면서 어차피 이 현실을 개선을 해나가는 거라면 난 차라리 눈에 보이는 개선을 해야겠다는 계기들이 있었고 그래서 정치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95년에 민주당에 입당을 했어요. 돌아보면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일에서 얻는 재미와 역사발전에 대한 긍정적 믿음 이런 것들이 저를 지치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5. 그럼 정치생활이 시작된 거네요.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농민운동을 한다는 것이 혁명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고, 내가 혁명가가 아니면 나는 차라리 괜찮은 정치인으로 남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지요. 사실 농민운동 하다가 정치로 간 사람들을 욕 많이 했죠 그때는. 내가 나쁜 짓 안 하고 정치 활동 올바르게 하는 모범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95년에 김근태 의원을 김대중 대통령이 영입했을 때 저도 운동권 후배로 함께 입당했어요. 민주당 들어가서 전남도당 여성국장으로 당무를 하고 98년도에 도의원 비례 받아서 도의원 먼저하고 2006년 노무현 대통령 때는 열린우리당으로 해남군에서 군의원 했고요. 정치하면서 여러 가지 제도를 개선하거나 조례를 만든 게 의미있는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여성 농업인 출산 보조금 지원 조례라든가 다문화 가정 관련 조례 만들고, 교육청과 업자들간의 고리를 끊게 한 것 뭐 그런 것들을 재미있게 했어요.
6. 의원 활동하시면서 뿌니가 한 일 중에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게 있다면 자랑 좀 해주시죠.
제가 전남도의원 되자마자 그때가(1998년) 허경만 지사때인데 조직개편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이분이 ‘여성’이 들어가는 국을 없애고 보건복지국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어요. 그땐 제가 제일 어린 여성의원이었는데 안 되겠다싶어 여성의원들을 모았죠. 현직 여성의원 3명, 전직 여성의원 3명이 지사님 만나서
“ ‘여성’ 자를 살려야 된다, 전남 인구 절반이 여성인데 ‘여성’을 빼면 어떻게 하느냐?”
해서 ‘보건복지여성국’으로 해서 여성국을 살렸어요. 그리고 해남군의원 할 때 국제결혼대행업체와 군이 베트남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걸 이슈화해서 정부정책을 끌어낸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지역 사람들이 결혼대행업체와 연결되어 있어서 압력을 많이 받았거든요.
7. 이제 좀 자유로워지신 건데 뭐 하고 지내시나요? 여행도 다니고 하셨나요? 추천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누구랑 가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전남에 오래 살았다고 해도 안 가본 데가 너무 많은거예요. 행사장이나 갔지 구석구석 다닌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여수, 신안, 진도 구석구석 다니고요. 섬 여행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일 추천하고 싶은 섬이 있어요. 신안 12사도 길이 참 좋았어요. 한나절 여행도 가능해요. 아침배 타고 들어가서 오후 배 타고 나오면 되고, 숙소도 있지만, 당일치기도 가능해요. 노두길 걷고 얘기하면서 밥 한 끼 먹으면 서너 시간이면 충분해요. 주로 해남 살 때부터 친한 후배들하고 같이 여행해요. 사회운동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고 제가 선거에 나갔을 때 선거운동 열심히 해준 사람들이에요.
이 분들이랑 여행도 같이 가고, 또 제가 목포사니까 목포시에서 하는 프로그램 있잖아요. 오전에 하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은 거예요. 공짜로 배울 수 있는 게 많아서 일본어도 배우고, 영화제작 프로그램도 배우고 가끔 광주 와서 광주 언니들하고도 만나고 그래요. 그중에 친한 임영희 선배가 오월민주여성회하고 광주5·18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을 맡아서 저도 거기 이사 맡아서 하느라고 광주에 더 오가고 있어요. 그래서 언니들한테도 광주도 자주 오고 하니까 “나 이제 광주여성민우회 하련다.” 그랬죠.
언니들에게 민우회에 가긴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고 옛날이랑 달라진 것 같다고 했는데 오늘 얘기하다 보니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해가 됐어요. 언니들한테도 얘기해줘야겠어요.
-뿌니는 인터뷰를 마치고 <다양한 가족구성권> 캠페인에 쓰일 에코백을 한 아름 건네주었습니다.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바로 가입도 하였고요. 앞으로 뿌니와 함께할 활동들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