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소식지
[민우통신문 2025-1호] 연극 '프라이드' 후기글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5-05-28
- 조회 수
- 45 회
활동가 희동
- 아직도 모르는게 너무 많은데,
어느새 4년차 활동가라니?
안녕하세요, 광주여성민우회 활동가 겸 2025년 편집위원 희동입니다. 점점 날씨가 더워지고 있는걸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는데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 초여름의 6월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게 6월은 점점 프라이드 먼스로써의 의미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1969년 6월 28일, 미국 뉴욕시 스톤월에서 일어난 동성애자 해방 항쟁을 기념하여 전세계적으로 6월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선 차별과 편견에 저항하고 퀴어 당사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퀴어 프라이드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곧 다가오는 6월에 맞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연극이 있어 이렇게 후기글 겸 소개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연극 ‘프라이드’
자긍심, 자부심이라는 단어가 곧 제목인 이 연극의 지리적 배경은 영국 브라이튼이며, 1958년과 2008년이라는 다른 두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 세 명, ‘필립’ ‘올리버’ ‘실비아’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됩니다.
시대적 배경을 보면 아시겠지만, 1958년의 영국은 동성애를 탄압하고 ‘변태적’이며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1958년의 필립과 실비아는 부부이고, 동화작가인 올리버는 실비아의 초대로 그들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필립과 올리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필립은 같은 남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자신을 부정하고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실비아는 배려심 깊고 이타적인 성격으로 필립과 올리버의 관계를 이해하고 묵묵히 감내합니다.
2008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게이 커플입니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올리버의 성격을 견디지 못한 필립은 올리버와 헤어지려 하고, 실비아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탈리안 애인과 행복하게 지내며 필립과 올리버의 활달하고 당당한 앨라이¹ 친구로 등장합니다.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지만 각각 같은 이름을 가진 배역을 동일한 배우가 연기함으로 인해 관객은 58년의 필립-올리버-실비아와 08년도의 필립-올리버-실비아에게 강력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연출과 각본 역시 다른 시대의 인물을 마치 연결된 것처럼 보여주고 있고요.
58년의 필립과 올리버, 08년도의 필립과 올리버가 번갈아 등장하는 것을 보고있으면 08년도의 둘의 싸움은 오히려 감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들의 싸움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에요. 2008년에도 게이를 향한 편견은 남아있었습니다만 1958년의 둘에 비하면 적어도 같은 남성을 사랑한다는 지점에 스스로를 혐오하고 부정해야 하진 않았으니까요. 극을 관람하는 동안 이런 대비가 명확히 드러날 때마다 1958년의 그들이 얼마나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는지 직간접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겪는 폭력에만 집중하다 보면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여성의 존재입니다. 남성 동성애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퀴어 서사에서는 종종 주변인으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너무 소모적인 역할로 나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생깁니다. 서사의 전개를 위해 주인공들의 시련이 되기도 하고, 무조건적인 배려를 보여주는 수동적인 장치로써의 여성이 아닌지에 대한 비판이지요. 이 극에서 실비아라는 캐릭터 역시 그런 비판을 완전히 피해가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58년도의 실비아와 08년도의 실비아의 대사에서 이 극의 핵심인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분명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보다 필립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58년 실비아의 대사에 안타까워하다가, 08년도의 실비아가 장난스럽고 또 퉁명스러운 말투로 "나는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아무렇지 않은 대사 한 줄이 주는 안도감이 있어요. 1958년, 고통스러웠던 그 머나먼 시간에서 괜찮아질거라는 듯 아득하게 닿아오는 위로의 한 문장이 실비아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을 본 것 같았습니다. 어떤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가질 수 없는 사회, 누군가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없는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나 자신을 찾기 어려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2008년도의 필립과 올리버는 브라이튼 지역의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재회합니다. 그 장면에서 브라이튼이라는 도시의 50년에 대해 상상해보게 되는데요. 1958년, 필립과 올리버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통받아야 했던 그 도시는 2008년에 와서는 매년 브라이튼 프라이드 행사가 열리는 LGBT 친화적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건 더 나아가서 필립과 올리버, 실비아가 거주하는 브라이튼이라는 지역뿐만 아니라 세상이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나타내기도 하죠.
58년에서 08년까지 50년,
08년도에서 25년까지 17년.
2014년 한국 초연에서 2025년 한국 다섯 번째 상연까지 11년입니다.
극 중의 시간도 정말 오래 흘렀고 이 연극이 세상, 또 한국에 온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만 아직 연극 ‘프라이드’가 무대 위에 올라온다는 건 이 극이 상연될 이유가 있다는 의미겠죠. 아직 자신이 자신에게 닿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이 극은 아직도 무대 위에 올라올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존재가 LGBT이건, 여성이건 간에요.
[당신이 –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이 연극은 누군가가 과거에서 보내는 위로와 자긍심이 현재에 닿길 바라는 염원이 실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관객에게, 2008년도에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지금의 당신이 미래의 당신에게.
이 연극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우리가 가진 역사를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때까지요.
연극 '프라이드'의 이번 시즌은 2025년 3월 29일부터 6월 22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아트원 2관에서 공연됩니다.
서울을 방문하실 계획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한 번 보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1) 앨라이 (Ally) : LGBTQ당사자는 아니어도 그들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