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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통신문 2024-3호] 초보 성교육 강사 이야기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4-11-24
- 조회 수
- 66 회
초보 성교육 강사의 일기 3 : 갈색의 시간
뭐라도 해야 한다. 내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갈색 시간은 인내하는 시간, 나의 정성을 축적해야 하는 시간이다.
나의 2월은 그야말로 갈색의 시간이었다. 공식적으로 무려 12년의 경력단절 기간을 보내고 정규직이나 계약직의 세계로 들어서 보려던 나는 세상의 비정함에 화들짝 놀라, ‘그래 이런 곳이었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반성하며 응시원서와 자기소개서를 고치면서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는 2월을 보냈다.
남은 것은 작년에 뿌려 놓은 씨앗, 성교육 강사로 일할 기회뿐. 성교육 강사는 내게 2안이었다. 나의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탓에 올해의 문구는 문지혁 작가의 『중급 한국어』에서 찾아낸 잠언 16장 9절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3월이 가까워져 올수록 2안은 1안이 되어갔다.
3월의 시모임에서 ‘갈색의 시간’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줄리 폴리아노의 『봄이다! 』의 주인공 소년은 온통 갈색의 땅에 씨앗을 심는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새싹이 돋아나는 초록의 세상은 올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땅속에선 뿌려둔 씨앗이 꿈틀꿈틀 자라나며 땅속의 동물들이 꼬물거리며 봄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절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봄이 어느 순간 다가와 갈색의 땅이 온통 초록색이 되며 책은 끝이 난다.
성교육 강사로 진로를 정했다지만 나는 소년과 다름이 없었다. 그저 양성과정을 거치고 몇 번의 수업을 경험한 것일 뿐. 강사로 나서기엔 부족함이 너무나 많은 상태여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채워가야 하나 막막했다. <2024 청소년 성교육 지도자 역량 강화 연수>, <시의적절 성교육>,<광주여성회 성교육 전문강사 양성과정>,<딥페이크 사태, 정확한 진단을 위한 지도 그리기 특별강좌> 등 수업을 듣고 김항심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 <성교육하는 사람들의 속 이야기> 수다회에 가서 선배 강사들은 어떤 태도, 어떤 마음으로 성교육을 하는 건지 탐색했다. 새로운 수업을 할 때면 도서관에 가서 성교육 관련 책들을 빌려오고 성교육 관련 블로그도 팔로우하고 있다. 물을 주며 기다리는 소년의 심정으로.
1학기 수업을 하면서는 수업 준비로 버거워서 헥헥거렸는데 겨우 9개 학교에서 수업한 게 다다. 백래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례한 아이들이 많은 반을 몇 번 만나게 되기도 해서 다른 강사님들이 경험치를 쌓이게 할 모양이라며 위로를 해주었다. 2학기 첫 수업이 시작된 날은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뉴스가 터져 나온 날이었다. 딥페이크 보도 이후 이전의 <디지털 성폭력 예방교육>이 허망하게 느껴졌고 이렇게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건 어른들이 바뀌지 않아서인 듯했다. 양육자 성교육이 시급해 보였다. 마침 글쓰기 수업을 듣는 곳에서 칼럼을 쓸 기회가 생겨 악에 받쳐 그와 관련한 글을 쓰기도 했다.
2학기는 8월 말 한 학교의 수업 이후 수업 일정 공지가 없는 9월과 10월을 보냈다. 10월 말쯤까지 여러 명의 강사가 출강하는 수업은 잡히지 않았고 작년에 출강했던 학교들도 방송 수업으로 대체했음을 월말 게시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계속 이렇게 기회가 줄어드나 싶었을 때 첫 양육자 성교육 수업을 제안받았다. 단비와 같은 기회! 다 회차 강의를 나 혼자 오롯이 준비하는 것도 처음이고, 양육자를 만나는 수업도 처음이었다. 작년에 경험한 다섯 학교의 강의, 올해 경험한 10개 학교의 강의안들과 내가 수강한 수업들, 읽은 책들이 이 수업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이게 내가 뿌렸던 씨앗들이었던가? 이제야 새싹이 올라오는 건가?
얼마 전 교정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남동생에게 교도소 내에 성폭력범 비율을 물어보았다. 내가 성교육 강사가 되었다니 무자격자가 성교육 강사를 한다고 한 마디 던지던 녀석에게 나는 발끈하지 못했다. (그래도 필요한 수업자료는 취합해서 넘겨줬다) 나도 한때 한심해 보이기만 하던 나의 대학 동기들이 학원 강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 아이들을 믿고 누가 수업을 받나 안쓰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위촉장을 받은 지 1년이 넘은 지금, 나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은 초보 강사지만 ‘자위’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첫 수업 때와 달리 이제는 편안하게 발화할 수 있게 된 단어들이 많다. 첫 시연에는 텍스트만 가득한 PPT 같지 않은 PPT로 시연을 했지만 이젠 애니메이션 효과도 넣을 수 있는 정도는 된다. PPT 초보자인 딸이 나름 부러워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가끔은 딸내미에게 엄마가 이렇게 자료 만들었다 자랑도 한다. 조금은 자란 것 같다. 초록이 가득한 봄은 아니지만 내게도 봄이 오고 있다고 믿는다.
뭐라도 해야 한다. 내가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름표라도 만들어 꽂아두고 매일 지켜봐야 한다. 어떤 일이든 갈색 시간을 생략할 수 없고, 건너뛸 수도 없다는 것. 그걸 인정하는 순간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중략). 갈색 시간은 인내하는 시간, 나의 정성을 축적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화정, 『우리의 영혼은 멈추지 않고』,<봄을 맞이하는 마음>,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