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소식지
[2022-12 광주여성민우회 민우통신문] '당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인터뷰-최희연(몽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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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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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 해,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일명, “당(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찾아서). 작업을 진행한 활동가들은 이 사업을 프로젝트로만 끝내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지속적으로 회원들을 만나는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했다. 광주여성민우회를 자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모먼트로 꼽는 현, 광주여성민우회 대표이자 몽실이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한 최희연 회원을 인터뷰 자리로 모셔서 이야기를 청했다.
Q.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 3가지는 무엇일까요?
최희연(몽실, 이하 몽실): ‘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또는 나를 생각하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딱 세가지를 고르라고 하니까 어렵네요. 일단 저는 자기애가 높은 사람 같아요. 그리고 마이크. 마이크가 제게 있고 없을 때의 느낌이 달라요. 마이크를 잡고 있을 때 느껴지는 살랑살랑한 긴장감과 설렘이 좋아요. 그리고 저는 ‘역동적인 걸’ 좋아해요. 그래서 운동, 춤 이런 거 좋아해요. 몸에 느껴지는 역동적인 감각 같은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먹는 걸로는 두부, 버섯 좋아해요. 너무 웃기네요. 결국 먹는 걸로 끝났네요.
Q. 민우회랑 어떻게 인연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몽실: 대학교 때 총여학생회 활동을 했거든요. 민우회 전 대표인 날다(백희정)가 동기이기도하고 당시 같이 활동했었어요. 졸업하고는 다들 각자의 삶을 살았죠. 친구인 날다가 상담소에서 먼저 일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보니 날다가 왜 거기서 일을 했는지는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이야기하다보니 궁금해지네요. 여하튼 광주여성회라고 운동을 지향하던 여성들이 모여 있던 조직이 광주여성민우회로 조직 전환을 하기 전에 상담소를 먼저 만들어서 운영을 했는데 그 때 날다랑 같이 상담소 일을 함께 했죠. 그 때 상담의 시옷도 모르던 시기라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때 상담원 교육과정이 64시간이었는데 광주는 교육하는 곳이 없어서 전주성폭력예방치료센터로 교육받으러 다녔었어요. 시외버스 타고.. 그 때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부장적이시고 남성 우월주의를 갖고 있어서 저랑도 갈등이 있었는데 그 때 느꼈던 차별 감각 같은 것들이 민우회 활동을 하게 된 큰 계기 같아요. 그런데 광주여성민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고 창립멤버가 되었지만 얼마 되지않아 그만뒀어요.
Q. 중간에 민우회를 그만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몽실: 제가 상담을 하면서 상담에 전문성을 갖거나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실제 행정, 사무업무를 해본 적도 없다보니 그런 게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을 그만뒀어요. 공백기를 가지면서 아이를 가지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일이 안 맞고 힘들어서 회피한거죠.
Q.일이 안맞아서 그만두셨었는데, 다시 민우회로 돌아와 함께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몽실: 5년 정도의 공백을 갖는 시간동안에 두 아이를 출산했어요. 둘째가 3살쯤 되었을 때, 전진숙 선배(광주여성민우회 전 대표)가 찾아왔어요. 그 때 진숙선배가 찾아왔던 게 제게 중요했던 게 그 전에도 민우회 사무실로 갈 수는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갈 수 있어도 연결고리를 만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 당장 찾아가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회원들의 그런 마음을 조금 아는 것 같아요. 활동가들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와주기를 바라지만 그 분들은 막상 오기가 쉽지 않죠. 활동가들이 그 분들이 올 수 있는 다양한 연결지점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 때 진숙 선배가 찾아와서 일을 이제 해야되지 않겠냐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 해줘서 고마웠어요. 그 계기로 다시 민우회에서 조금씩 회원사업 하고 조직활동, 비상근 활동하면서 그렇게 민우회와 다시 함께하게 되었어요.
Q. 몽실이라는 활동명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몽실: 안 그래도 얼마 전 어떤 분이 제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활동하게 되었다고 하니깐 그 곳이랑 맞는 별칭으로 바꾸는 건 어떻겠느냐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더라구요. 나한테는 너무 익숙한 별칭인데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미지가 있나봐요. 예전 동화 몽실언니 같은^^ 몽실이라는 별칭은 대학에서 총여학생회 활동하면서 지어졌는데 누가 지어준건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아마 그때 제가 단발머리라 외모 보고 촌스럽다면서 붙여진 이름 아니었을까요 싶네요. 대학 때 몽실이라는 이름을 별명처럼 쓰다가 민우회에 왔는데 별칭을 지으라고 하는거에요. 불리고 싶은 별칭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그때 불렸던 별명을 사용하게 된 것 같아요. 그때 좀 고민을 하고 별칭을 지었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못했어요. 활동가들이 자신의 별칭을 지을 때 어떤 의미들을 붙이거나 비전을 붙이는 걸 보니깐 저도 별칭의 의미를 달리 생각하게 되긴 했는데..쉽게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이제 새로운 활동가들이 오면 별칭을 신중하게 지으라고 말해줘야겠어요. 평생 갑니다. 그 별칭 ^^
Q.몽실에게 민우회에서 일할 때 기쁨과 슬픔이 있었다면?
몽실: 기쁨과 슬픔은 너무 많죠. 제 삶은 민우회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어요. 민우회 전의 나는 나라는 사람을 잘 몰랐던 거 같아요. 그런데 민우회 활동을 하면서 나란 사람, 최희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거 같아요. 그 전에 나를 떠올리면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 그런 걸 잘 몰랐다면 민우회는 나를 발견하게 해줬어요. 내가 이런 걸 좋아할 수도 있구나, 이럴 때 재밌어 하는구나 그런 걸 발견하게 되었죠.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저는 그냥 착한 큰 딸,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던 거 같아요. 순종하고, 착한 게 정답이라고 배워왔는데 그 ‘착함’이라는 게 뭐지? 여성들에게만 강요되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세상을 달리 보고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죠. 그런 면에서 민우회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에요.
음...구체적인 순간을 떠올린다면 제가 민우회 대표가 됐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마도 총회 자리에서 대표로서의 포부를 밝힐 때였던 것 같은데 그 순간 다른 활동가들이 너무 든든했어요.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저 활동가들이 함께 해결해 줄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두려울 게 별로 없더라고요. 이게 조직이고 나의 사람들이구나 그걸 제가 스스로 깨닫는 순간 진짜 행복했고 마음이 너무 가벼워졌어요.
일의 슬픔이라고 하면 슬픈 건 아니고 진짜 조직에 미안했던 기억인데 제가 개인 사정으로 외국에 갔다와서 사무국장을 하게 됐어요. 제가 생각보다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어서 다른 시민단체 활동가들이랑 교류를 잘 못했던 것 같아요. 시민단체 사무국장은 그런 깜냥이 있어야 되잖아요. 지역의 흐름이나 돌아가는 판세도 잘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 때 시작한 게 시사인 잡지 읽기였던 것 같아요. 뭐라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생각한거죠. 그런데다가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어요. 일 자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제가 사무국장으로서 잘해야 되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으니 내 스스로가 답답하고. 그런 마음들이 커지면서 스트레스도 받으니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죠. 그래서 그때 또 한 번 도망갔어요. 사무국장이 갑자기 공석이 되니 조직 상황이 무척 흔들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남은 활동가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공식적으로 인터뷰에 꼭 써주세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고..
Q. 올해 몽실은 연극모임 ‘시나페’ 풋살모임 ‘킥킥킥’ 책읽기 모임 ‘페독’ 이렇게 올해 소모임 3개에 참여하는 소모임 끝판왕을 하셨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소모임이 있으신가요?
몽실: 하하하. 올해 제가 그렇긴 했네요. 민우회에 다시 복귀하면서 회원조직사업을 맡았었거든요. 전 여전히 회원 조직사업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전 기록 찾아보면 6-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서로 의식화 작업들을 하잖아요. 그러면서 서로 성장하고. 그래서 민우회도 초창기 때 회원 소모임 활동들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 고민이 제게도 계속 있었던터라 올 해 ‘페’미니즘‘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됐어요. 안 그래도 이 인터뷰 오기 전에 페독 모임 구성원들이랑 송년회 겸 평가 모임 했는데요.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재미있어 보여서 좋았대요. 본인이 혹시 모임에 참석 못하게 될 경우 모임지기가 너무 지쳐보이고 힘들어보이면 너무 미안한 상황이 되니깐 오히려 모임이 부담 됐을꺼 같은데 제가 모임 자체를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부담이 덜 됐었다고 하시더라구요. 실은 페독은 정말 의무감으로 한 게 있긴 해요. 그런데 그 의무감이라는 게 나쁜 의무감은 아니었어요. 적당한 긴장과 기쁨의 의무감이었다랄까..하하하.
저는 회원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문턱 낮은 소모임이 진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신입회원이나 민우회 활동을 해보려고 하는 회원들에게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소모임이 있을까요?"그럴 때마다 딱히 소개할 만한 소모임이 없다는 게 답답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게 책모임이었구요. 전 페독 구성원들에게 계속 이야기해요. 우리는 가늘고 길게 가자고.
여성주의 연극모임 ‘시나페’는 제가 사무국장한다고 했을 때도 시나페 활동은 하게 해주라고 할 정도로 저에게 민우회 활동과는 다른 에너지를 주는 곳이에요. 제가 여기 아니면 어디 가서 연극이란 걸 해보겠어요. 시나페 활동 전에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일이 아니였거든요.
올해 생긴 풋살모임 ‘킥킥킥’ 활동도 했는데요. 풋살하는 그 시간 동안은 다른 생각 정말 안 하고 딱 몸만 쓰고 오거든요. 그 시간이 좋은 것 같아요. 당장 연습 있는 날 연습 끝나고 집에 가면 다른 일을 해야하는데도 연습에 가면 다 잊어버리고 풋살만 해요. 그런데 막상 끝나고 오면 현타가 오죠. ^^ 일이 또 밀렸다. 하지만 그래도 또 그만큼의 에너지를 풋살하면서 받는 것 같아요.
Q. 3개의 소모임 활동이라니. 생각만 해도 정신 없던 한 해였을꺼 같아요. 안 그래도 저희가 몽실 인터뷰 준비하면서 다른 활동가들에게도 질문꺼리를 물었는데 한 활동가가 꼭 물어달라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그렇게 바쁘게 사냐고?
몽실: 제가 어렸을 때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주어진 삶만을 산다고 생각했다가 민우회 활동을 시작한 후로는 전, 저를 계속 스스로 '발견'하고 싶은 것 같아요. 또 그런 것도 궁금해요. 내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나하는...그래서 자꾸 도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실은 제 나이가 한국사회 기준으로 적은 편은 아닌데 갈수록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우리 회원 활동하시는 분들 보면 나이에 상관없이 하시잖아요. 공부도 계속 하시고..그런 모습 보면서 나이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타투나 피어싱도 제가 나이 들어서 했거든요.
사람이라는 건 유한한 존재잖아요. 내가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 때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은거죠. 그러니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자 싶고, 중요한 건 당신이 원하는 걸 해도 된다고 하는 조직이 제게 있다는 사실 같아요. 예전 속담처럼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도 뻗는다고 하는데 제겐 민우회라는 무대가 있으니 그 무대에서 다리도 뻗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제가 확장되는 거죠. 그래서 가끔 몸의 피곤은 느끼지만 그건 흔히 말하는 소진과는 다른 결인 것 같아요.
Q. 피곤함과 소진되는 건 다르다는 말 좋네요. 몽실이 대표의 역할을 하고 계시니 어떤 책임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을꺼 같고, 또 중요한 걸 결정해야 할 때 무게감도 다를 꺼 같은데요. 그럴 때 몽실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몽실: 맞아요. 그런 게 있죠. 책임과 무게감. 그럴 때 에너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도 운동을 하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고 싶으면 운동을 해라’라는 말을 인생의 모토처럼 요즘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제가 유튜버 ‘입 짧은 햇님’을 좋아하는데 햇님이 그러더라구요.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들면 체력을 키우라고.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는데 해결이 안 되거나 갈등 상황을 마주할 때 저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요. 실은 한 사람하고 특별히 친한 걸 경계하려고 하는 편인데도 가끔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 있어요. 너무 힘들어보인다거나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죠. 그리고 진정성 있게 이야기하면 안 될게 없다는 믿음이 제게는 있구요.
제 나이가 50이 되었을 때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어요.(이렇게 나이가 밝혀지네요^^)
일단 저희 큰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독립을 했거든요.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 50을 내 인생에 중요한 포인트로 삼자고 작정한 게 있어요. 그런데 그 때 대표를 제안받은 거죠. 그 때 진짜 망설임 없이 해보겠다고 한 것 같아요. 이제 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저는 인생을 나이테로 표현하자면 굵직굵직한 나이테가 생기는 때가 있는 것 같거든요. 민우회에 다시 돌아온 그 때가 한 번의 굵직굵직한 나이테가 생긴 때였다면 그 다음은 제 나이 50. 대표가 된 지금 이 시기인 것 같아요. 아, 그런데 제가 이야기했지만 멋진 말인 거 같네요. 인생의 나이테가 굵어지는 때.(모두 웃음)
Q. 와. 정말 멋진 말이네요. 인생의 나이테가 굵어지는 때라니...몽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저희도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를 내가 만든다..
몽실의 나이테가 계속 굵어지는 때들을 응원합니다.
*편집자 주: 몽실의 인터뷰를 들으면서도 한 번 더 생각했다. 모든 여성들의 서사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고..
-광주여성민우회에서 올 한 해 10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인터뷰집 ‘당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발간되었습니다.
함께 읽어보아요!!
인터뷰 책자 파일 보기 https://c11.kr/18zjz